“뭐 하는 짓이야!”...송해, 전국노래자랑 중 공무원에게 고함친 사연
지난 8일 별세한 방송인 고(故) 송해(본명 송복희)씨의 삶을 담은 평전 ‘나는 딴따라다’(2015)를 집필한 오민석 단국대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평전을 위해 1년 동안 송씨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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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교수와 송씨는 20~30년 전, 인사동 수도약국에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20년 뒤, 낙원동의 한 사우나에서 우연히 재회했고, 두 달쯤 지나 낙원동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또 만났다고 한다. 오 교수는 13일 방송된 CBS라디오 ‘한판승부’에서 “제가 그쪽(낙원동)으로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자주 갔었다. 선생님 사무실이 거기에 있는데 제가 그쪽을 어슬렁거리다 보니까 그렇게 만남의 우연이 반복돼 (인연이) 그렇게 시작됐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반가운 나머지 낙원동 사우나 탈의실에서 발가벗은 채로 송씨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고 한다. 오 교수는 “그때 저는 시인이고, 문학평론가였다. 시집이 나왔길래 제가 사인을 해서 전화번호를 적어드리니까 당신도 저한테 사인을 해 주겠다고 그래서 제가 갖고 있던 책에 사인해 주시고 당신 전화번호를 적어주셨다. 저는 시집을 안 읽으실 줄 알았는데, 3일쯤 지났는데 전화가 왔다. 왜냐하면 그 시집 첫 번째 페이지에 전국노래자랑, 송해씨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 송씨가 먼저 오 교수에게 ‘소주 한잔 합시다’라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그때부터 절친한 사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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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나는 딴따라다’는 오 교수가 먼저 송씨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처음엔 송씨가 “나 같은 딴따라 이야기를 무슨 가치가 있다고 쓰느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 교수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렇게 설득했다.
“선생님은 살아 있는 박물관입니다. 일제시대 때부터 1927년(송해씨 출생년도)이면 일제강점기 한복판이지 않습니까. 한국전쟁 이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사건들인데 선생님 얘기를 쓰면 선생님 개인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까지 얘기할 수 있다. 또 유랑극단 시절부터 한류까지 그 중심에 계속 있었기 때문에 한국대중문화사를 이렇게 서베이(조사)하는 것도 되고 그다음에 한국 방송사 라디오, 흑백, 컬러TV 이렇게 이어지는 이건 굉장히 중요한 기록입니다. 선생님 연예인 후배들을 위해서 기록을 해야 됩니다”
송씨는 오 교수 진심에 바로 ‘승낙’을 했고, 그때부터 두 사람은 1년 간 동행했다. 오 교수는 오전엔 인터뷰, 오후에는 관찰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또 전국노래자랑 스케줄, 술자리, 광고 미팅, 가요무대 녹화 등 매니저처럼 쫓아다니면서 기록했다.
가까이서 본 송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오 교수는 “무대 위와 아래가 똑같은 건 다정다감하다는 것. 정이 그렇게 많다. 그리고 사람을 하나하나 디테일까지 배려하신다. 그건 실제로 무대 밖에서 더 깊고 심하시다”라고 기억했다.
‘어떻게 배려했냐’는 질문에 오 교수는 “처음에 관계가 서먹서먹할 때 일이다. 같이 백반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제가 밥 먹으려고 숟가락을 뜨면 반찬을 올려주셨다. 당신 입에 댄 젓가락으로 반찬을 떠서 제 숟가락 위에 놔주시는데 저는 그 다정함에 완전히 무장해제돼 어떻게 하지를 못하겠더라”고 했다.
송씨는 전국노래자랑을 34년간 진행하면서 안 싸운 PD가 없다고 한다. 오 교수는 “그분이 무대 완결성에 대한 욕구가 굉장히 강하다. 완벽해야 한다. 당신 MC만 잘 보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완벽해야 한다. 가령 녹화를 하다 보면 선생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초대가수가 마음에 안 든다든가 혹은 출연자들 중 선발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있다든가, 하여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냐. 조명이 어떻다든가 그런 걸 하나도 안 넘기신다”라고 했다.
오 교수는 “지금은 유명해지셨으니까 마치 송해 선생님이 갑 같지만, 방송 시스템에선 PD들이 갑이고 우리들이 을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을이던 시절에도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다고 한다. 무대의 완결성을 위해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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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는 특별한 녹화 일정이 없으면, 꼭 ‘목욕탕’을 방문했다고 한다. 송씨는 “오후 4시에 무조건 목욕탕을 가셨다. 온탕도 아니고 열탕에 들어가신다. 제가 옆에서 같이 해 봤다. 제가 훨씬 젊은데 저는 못 견디겠더라, 그 이상을 버티시고 나오셨다가 또 냉탕을 들어가셨다”고 했다.
또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오르기 전 해당 지역 목욕탕도 꼭 들렀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선 “지역 주민들하고 허심탄회 이야기를 해 봐야 당신이 무대에 섰을 때 더 이렇게 가깝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국노래자랑 악단 단원들과의 감동적인 에피소드도 공개했다. 오 교수는 “세월호 때였다. 몇 백 명이 졸지에 물에 수장된 심각한 사태에 전국노래자랑 하면서 웃고 이게 안 되니까 KBS에서 한 두세달 방영 자체를 중단한 적 있다. 이제 녹화를 안 하니 악단 멤버들이 출연료를 못 받지 않냐. 생활이 안 되고. 이분이 올라가서 담판을 지었다. ‘이 사람들 먹고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 ‘그동안 노래자랑에 이바지한 게 얼마인데 배려 해줘라. 돈 얼마나 된다고 그러냐’고 해서 밀린 출연료를 다 받았다. 그걸 보고 아무나 방송계에서 갑이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하신 분이다”라고 했다.
송씨가 자주 썼던 말은 ‘공평하게’라고 한다. 오 교수는 “(송씨는)전국노래자랑 녹화할 때 그 지역의 행정가들, 지역 국회의원이라든가 지자체장들에게 절대 별도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자리 없으면 중간에 앉으라고 한다. 이 무대의 주인은 행정가들이 아니라 국민들이고 시민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오 교수는 “충청도 어느 지역에서 리허설을 하는데, 공무원들이 관객들 앉는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송해씨가) 뭐라하셨다. 물어보니까 공무원들이 ‘여기 군수님 앉아야 되고, 구의원 앉아야 된다’고 하니까 송씨가 그냥 소리를 지르셨다. ‘당장 치워라’ ‘지금 뭐하는 짓이냐. 당신들이 제일 앞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으면 관객 국민들이 다 긴장한다. 앉고 싶으면 저 뒤에 아무데나 퍼져 앉아라. 특석이라는 건 없다’고 했다. 저는 그 위계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게 아주 좋았다”고 했다.
송해씨는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도곡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1927년생인 송해는 1955년 창공악극단을 통해 데뷔했으며, 1988년부터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아 34년간 이끌었다. 송씨는 국내 최고령 진행자임과 동시에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 부문으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오르기도 했다. 또 희극인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윤석열 대통령을 대신해 유족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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