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인의 단식투쟁은 시대와 정치 상황에 따라 변화했다. 맨 위부터 1983년 5월 ‘민주회복·정치복원’ 등을 요구하며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가택연금 중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 1990년 10월 서울 여의도 평화민주당사 총재실에서 ‘지방자치제 실시·내각제 포기’ 등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김대중 총재, 2016년 9월 국회의장 사퇴를 요구하며 국회 당 대표실에서 단식투쟁을 시작한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 2018년 5월 ‘드루킹 특검’ 수용을 촉구하며 국회 본청 앞 천막 안에서 단식 중인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 연합뉴스·경향신문 자료사진
1983년 김영삼 단식 이후 학생 시위 등 이어져 87년 민주화 쟁취 기폭제
1990년 김대중 ‘거대 여당’에 맞서 지방자치제 부활·보안사 개편 끌어내
2007년 ‘졸속 한·미 FTA 반대’ 천정배 25일·문성현 26일 최장 기록
2016년엔 이정현 ‘국회의장 물러나라’며 전무후무 집권당 대표의 단식
# 그때에는 도시가 온통 단식 광대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루하루 단식이 계속됨에 따라 관심이 더욱 커져 갔다. 다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단식 광대를 보려고 했다. 나중에 가서는 종일 조그만 격자 창살 우리 앞에 죽치고 앉은 예약 신청자들도 있었다. 밤에도 효과를 높이기 위해 횃불을 켜고 공연이 행해졌다.*
1983년 5월18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신군부가 정계에서 은퇴시킨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는 이날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언론통제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인사 복직, 정치활동 규제 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가택연금 상태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보도한 국내 언론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엄혹한 시절 언론검열과 보도통제를 뚫기 위한 주변의 노력이 더해졌다. 다음날 ‘민주산악회’ 인사 70여명이 동조 단식에 들어갔고, 부인 손명순 여사는 외신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려 단식투쟁 사실을 알렸다. 단식 8일째 당국은 김 전 총재를 서울대병원으로 강제입원시켰고, 전두환 정권은 권익현 민주정의당 사무총장을 보내 ‘단식만 중단하면 연금 해제와 해외 출국을 주선하겠다’고 회유했다. 김 전 총재는 “(정 해외로 보내려면)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는 한마디로 저항했다. 악화된 건강 상태를 염려한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등 재야 원로들의 만류로 그는 단식 23일째 되던 6월9일 투쟁 중단을 선언했다. “앉아서 죽기보다 서서 싸우다 죽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다.
언론은 그의 단식투쟁을 당시 ‘재야 현안·문제’ 등으로 표현하다 단식이 중단된 이후에야 ‘재야인사의 식사 문제’ 등으로 행간을 전하는 데 그쳤다. ‘모르는 사람은 몰랐던’ 단식이라지만 전두환 정권 불의를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아는 사람 모두에게 박수를 받은’ 이 단식투쟁은 이후 학생 시위 등으로 이어지며 4년 뒤 6·10항쟁으로 민주화를 쟁취해내는 기폭제 역할을 한 ‘정치인 단식’의 교과서와 같은 투쟁이었다.
1990년 10월8일.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는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내각제 포기 선언, 군 보안사령부 해체, 민생문제 해결 등 4개항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에 홀로 맞서 있던 김 총재는 평민당사 9층 총재실에 자리를 깔고 투쟁을 시작했다. 단식 4일째 7년 전 단식투쟁 주인공이었던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여당 대표로 단식 중단을 요청하기 위해 평민당사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당시 66세였던 김 총재는 단식 8일째에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됐고 농성을 이어갔다. 단식 13일째인 10월20일 여야 합의로 요구사항이 타결되면서 농성을 해제했다. 윤석양 이병의 민간인 사찰 폭로로 해체 요구를 받은 보안사는 기무사령부로 재탄생했고, 여권의 내각제 개헌 추진은 백지화됐다.
김대중 단식투쟁의 최대 성과는 무엇보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소멸한 지방자치제를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지방자치제는 1987년 대선, 1988년 총선에서 모든 후보와 정당이 공약으로 내건 사안이었다. 4당 체제에서 지방의회 선거 관련 법도 통과됐지만 3당 합당 이후 약속이 사실상 파기된 상태였다.
그의 단식으로 꺼져가던 풀뿌리 민주주의의 불씨는 되살아났다. 김 총재는 스스로 ‘미스터 지방자치’라 불러달라고 할 정도로 자치에 애착이 강했다. 1992년 대선 패배를 거치긴 했지만 결국 1995년 1회 동시지방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1997년 대선까지 승리하게 된다.
# 그러다가 40일째가 되면 꽃으로 장식된 우리의 문이 열리고, 열광하는 관중이 원형 극장을 가득 메우며, 군악대가 팡파르를 울렸다. 두 명의 의사가 단식 광대에게 필요한 검진을 하기 위해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 결과가 메가폰으로 장내에 보고되었고, 마침내 추첨으로 뽑히는 행운을 누린 두 명의 젊은 숙녀가 나타나 그 단식 광대를 우리에서 두서너 계단 밑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작은 탁자 위에 환자를 위해 주도면밀하게 가려 뽑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민주화와 수평적 정권교체까지 이뤄진 2000년대에 들어서는 ‘혼돈의 단식투쟁’이 여러 곳에서 벌어졌다. 2003년 가을은 단식의 계절이었다. 9월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를 석고대죄한다며 김근태 의원이 사흘간 단식농성을 벌인 뒤 ‘신생 여당’ 열린우리당에 합류했다. 10월엔 당시 열린우리당 임종석 의원이 정부의 이라크 전투병 파병에 반대하며 13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단식투쟁이 집권 세력 내부에서도 정치적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실례였다.
‘보수 우파’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도 그해 11월 단식 행렬에 뛰어들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비리 관련 특별검사 도입 거부에 반발해 단식을 시작했다. ‘특검 요구 단식’의 원조인 셈이다. 열흘간의 단식투쟁은 결국 특검을 관철시키며 성공했다.
하지만 검찰의 한나라당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물타기라는 비판을 듣는 등 역풍도 만만찮았다. 단식 기간 중 쌀뜨물을 마신 것을 두고 “몰래 곰국(곰탕)을 먹고 있더라”는 소문이 돌며 희화화되기도 했다. 단식투쟁계 대선배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농성 현장을 방문해 “굶으면 학실히(확실히) 죽는데이”라고 한 말은 지금도 회자된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3월에는 열린우리당 김근태 전 의장, 천정배 전 원내대표,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 무소속 임종인 의원 등 여권 정치인들이 정부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졸속 협상 중단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23일 단식’ 기록은 25일간 곡기를 끊은 천정배, ‘26일 단식’ 기록을 세운 문성현에 의해 깨졌다. 목숨을 건 투쟁도 ‘무조건 오래 굶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단식투쟁은 뚜렷하고 간명한 명분, 언론의 활용과 여론의 추이, 요구 관철·협상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 그 일은 그야말로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 버렸다. 단식 광대는 어느 날 즐거움을 좇는 대중들로부터 자신이 버림받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구경거리를 찾아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린 것이었다.… 그가 있는 데까지 다가와서는 그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새로 편을 이루는 무리들의 고함과 욕설이 난무했기 때문이었다.
보수정부로 접어들면서 정치권은 물론 언론·여론 지형까지 상대편 정치세력을 철저히 증오하고 혐오하는 쪽으로 극단화됐다. 증오 상업주의와 극단적 진영 논리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한 지위를 얻으면서 ‘약자의 최후 저항 수단’인 단식투쟁까지 비난이나 조롱의 대상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이던 2014년 8월19일부터 열흘간 광화문광장에서 단식한 경험이 있다. 37일째 투쟁 중이던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의 단식을 말리기 위한 단식이었다. 문 대통령은 저서에서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에 놓였는데 정부 당국에서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와서 위로하거나 단식을 만류하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회고했다. 2004년 천성산 터널 공사에 반대하며 단식농성을 벌이던 지율 스님의 단식 철회를 권유했던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당시의 기억도 떠올랐을 법하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전직 대통령 후보의 잘못된 처신’이라며 비난했고 여당 의원들은 성토에 나섰다. 지난해 법정에서 공개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의 업무수첩에는 ‘문재인 단식(광화문) 피케팅 시위 독려. 문재인 끌어내기. 자살방조(죽음의 정치)’라고 적혀 있었다.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의 지시를 받아적은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도 “자살방조죄.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도록 언론 지도’라고 돼 있었다. 문 대통령의 동조단식이 끝난 직후인 9월 초에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폭식투쟁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혐오의 정치가 불러낸 인면수심의 ‘갈 데까지 간’ 시위였다.
2016년 9월26일에는 전무후무할 집권여당 대표의 단식투쟁이 시작됐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정세균 국회의장이 물러나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라며 7일 동안 국회 대표실에서 농성을 벌였다. 정 의장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 건의안을 강행처리했다는 게 단식투쟁의 이유였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비선실세 국정농단의 핵심으로 파고 들어오는 국정감사를 ‘보이콧’할 구실을 찾으려 했던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왕조시대에 ‘전하 아니되옵니다’라는 경우는 있었지만 대통령에게 는 말 한마디 못하고 국회의장을 향한 무기한 단식이라니…. 코미디 개그다”(당시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라는 등 동료 의원들로부터도 비아냥을 들었다. 국감 일정을 늦추기는 했지만, 당시 단식투쟁은 ‘태풍을 막겠다고 혼자 서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시민들에게 ‘촛불을 들고 나설 수밖에 없겠다’라는 생각을 더 강화시켜줬다.
# 그로부터 다시 수많은 날들이 지나갔고, 그런 상태도 끝이 나게 되었다. 감독은 직원에게 썩은 짚이 든 이 우리는 충분히 쓸 만한데 왜 여기에 이렇게 방치하고 있느냐고 묻게 되었다.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다가, 마침내 숫자판을 보고 단식 광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막대기로 짚을 헤쳐 보니 그 안에 단식 광대가 있었다. “아직도 단식하고 있는 건가?” 감독이 물었다. “대체 언제까지 단식을 할 건가?”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지난 3일 조건 없는 ‘드루킹 특검’ 수용을 요구하며 시작한 단식투쟁이 9일째인 지난 11일 마무리됐다. “엄동설한에 버려진 들개처럼 싸우겠다”던 원내대표 취임 일성을 몸소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단식투쟁이 없었다면 특검 합의는 절대로 불가능했을까. 단식투쟁 전후 한국당과 지방선거 후보 지지율에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는가. 오히려 정치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미성숙한 면모만 부각됐다. ‘준폭식투쟁’쯤 되는 피자 배달이 국회 농성장으로 오는가 하면, 국회 경내에서 일반인에게 턱을 맞는 일까지 벌어졌다. ‘김성태 턱검 가즈아’ ‘자학당의 턱검 쇼’라는 조롱도 난무했다.
단식투쟁은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의 돌멩이다. 압제자와 다수 시민의 양심에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횃불이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일생 동안 공식적으로만 17회 단식을 하며 영국의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저항했고 인도인들의 화합을 기도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옥중에서 비인간적 죄수 처우에 대항해 단식투쟁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 같은 정치적 투사가 이끌던 시대는 지났다. 보는 사람이 부끄러워지는 게 아니라 단식투쟁에 나선 이가 조롱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 됐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단식 광대’에서 주인공은 ‘단식 쇼’로 전성기를 구가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커스단과 동물원으로 향하는 대중들에게 더 이상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광대 놀음에 비유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단식투쟁이 과거의 비장함에서 조롱의 대상까지 돼 버린 지금의 현실은 카프카적 부조리한 상황과 묘하게 닮아 보인다. 목숨을 건 단식을 통하지 않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엄혹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는 지났다.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이제 정치인들의 단식투쟁은 조롱과 희화의 대상이 된다. 단식투쟁에 새겨진 정치사회적 변화상이다.
* 인용문 출처 ‘단식 광대’(프란츠 카프카 지음·홍성광 옮김, 열린책들)
<정환보 기자 botox@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182109005&code=910100#csidxd8fb602c8ed75e79e24c73c08a6ee2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