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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머물기

海 松 2022. 2. 27. 06:50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머물기

 

                                     

나 홀로 사는 수행처,

태백산 자락 무학대(無學臺)에서 동안거를 마치고도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

이곳에서 나는 네 가지 즐거움에 빠졌다. 하나는 날마다

새로운 산속 풍경을 눈에 담는 즐거움이다. 맑은 햇살과 푸른 하늘,

투명한 달빛과 무수한 별빛들, 엷은 먹으로 그린 수묵화 같은 아홉 겹의 산마루들이 매일매일 밝음으로 다가온다. 두 번째는 고요함 속에 나를 에워싼 솔바람소리와 새소리를 귀로 듣는 즐거움이다. 세 번째는 맑고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후각과 미각으로 만끽하는 즐거움이다. 네 번째는 매 순간 초심(初心)으로 하루를 일구는 즐거움이다. 눈·귀·코·입 감관을 통해 인지된 대상들이 주는 즐거움은 오직 초심으로 대할 때 참 행복으로 완성된다.

‘현법낙주(現法樂住)’, 초심으로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내 초심의 연원은 틱낫한 스님이다.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미래를 기다려야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당장 오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숨을 내쉬며 미소 짓는 수행을 할 때 다시 말해 느긋하고 편안하게 걸을 때면 우리는 이미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틱낫한의 『아미타경』)

초심은 과거 아닌 현재의 마음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길은
이미 누구에게나 갖춰져 있어
그걸 꺼내 쓸 줄 아는 게 초심

2013년 봄 틱낫한 스님이 프랑스 보르도에서 88세 노구를 이끌고 세 번째 방한했을 때, 큰 스승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보름동안 바라지를 자청했다. 개인적으로는 스승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시기였다. 마음의 스승이었던 백양사의 서옹 스님이 떠난 지 10년째였다. 서옹 스님을 모시고 무차선회를 하고, 참사람 수행결사와 IMF 외환위기 실직자 단기 출가 수행 프로그램을 운영한 3년 동안은 무척 신이 났었다. 그 후 7년을 7박 8일의 참선수행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러나 공부가 부족하니 바닥이 훤히 드러났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큰 스승이 계실 때 지혜와 자비의 눈이 활짝 열렸더라면 지금 만나는 사람들을 더 쉽게 올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을 텐데’하는 후회와 한계로 몹시 답답했다. 때마침 ‘참여불교’라는 새로운 불교의 방향을 제시하고, 세계평화운동과 안거수행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모순을 극복하는 수행법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틱낫한 스님과의 만남은 나에게 다가온 활구(活句)였다.

어느 날 틱낫한 스님과 나란히 걷다가 문득 한발 앞서서 걷는 나를 발견했다. 멈추어 스님을 돌아보았다. 한발 한발이 시작이면서 마지막이었다. 모든 순간이 온전히 평화롭고 따스하게 존재했다. 반면 내 마음은 추측의 목표지점으로 먼저 다가가고, 몸은 바삐 움직이는 초라한 걸음걸이였다. ‘스님이 저 곳으로 가려하는구나. 안전하게 보호해드려야지’하는 생각에 이끌린 빈껍데기 걸음이었다. ‘앞서는 마음을 내려놓고 발을 맞추자’ 생각하고 보조를 맞추니 비로소 스님과 호흡이 맞았다. 호흡이 맞으니 마음이 맞는 듯했다. 그 순간 마주보고 웃었다.

매 순간이 초심이어야 한다. 번뇌가 일어나기 전의 평화로운 마음, 기대하는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행복한 마음, 집착이 일어나기 전의 자유로운 마음을 온전히 쓸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큰 스승으로부터 ‘지금 온전하게 살아있는’ 걸음마부터 배웠다. 틱낫한 스님과 함께한 십오일은 그야말로 알토란 같은 시간이었다. 스님은 ‘일주일에 하루는 게으른 날을 만드세요’, ‘혼자하려 하지 말고 제자를 기르세요’라는 단 두 마디 말씀을 남기고 출국 비행기에 오르셨다. 그 순간 ‘아! 저 어른이 그 먼 곳에서 나를 온전히 가르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오셨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그러고 10년이 흐른 지난달 22일 새벽, 틱낫한 스님의 열반 소식이 들려왔다. 방한 당시 틱낫한 스님의 일정을 주관했던 불교TV에 분향소 설치를 제안했다. 그러자 분향소에서 8일 동안 상주 노릇을 해달라는 답변이 왔다. 동구불출(洞口不出)을 결심한 안거였지만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니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화』 등 한국어로 출판된 틱낫한 스님의 책이 무려 90여 권이다. 그중 소장하고 있는 책 50여 권을 분향소에 전시했다. 마음에 담아두면 좋을 구절들을 뽑아 캘리그라피 같은 글씨로 한지에 적어 조문(弔問) 온 도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초심은 과거의 마음이 아니라 현재의 마음이다. 거기서 나오는 언어들은 깨달음의 언어들이다. 언제나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길은 밖의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다. 그것을 꺼내 쓸 줄 아는 방법이 초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