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베리아
만물상] '서베리아'
이진석 논설위원 | 2018/01/26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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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서울 기온이 영하 17도로 예보됐다. 며칠째 세상이 얼어붙었다. 이번 겨울은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12월 15일 벌써 한강에 첫얼음이 왔다. 1946년 이후 71년 만에 가장 일찍 얼었다. '서베리아'라는 말이 생겼다. 서울 추위가 시베리아를 뺨친다는 뜻이다. 인구 1000만명이 넘는 세계 16개 남짓 도시 중에서 서울만큼 겨울 추위와 여름 더위 사이를 큰 폭으로 오가는 곳도 드물다.
▶세조 즉위를 비판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 김종직은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그가 쓴 '고한(苦寒)'이라는 시가 있다. '여름에 더위를 못 겼디겠더니 겨울에는 추위가 또 극심하구나. 일 년에 두 가지가 극심하니 하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기록에 남아 있는 서울의 역대 최저기온은 1927년 영하 23.1도지만, 옛날에는 더 추운 날도 있었던 모양이다.
▶서울은 북위 37도인 다른 도시들보다 더 춥다. 서울과 위도가 같은 그리스 아테네는 요즘 영상 18도를 오르내린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도 비슷하다. 우리는 유라시아대륙 동쪽 끝에서 시베리아 고기압의 영향을 받는데, 두 도시는 해양성 기후에 난류의 덕도 본다. 위도가 더 높은 중국 베이징도 요 며칠 서울보다 덜 추웠다.
▶북미의 추위는 유명하다. 눈(snow)과 종말(armageddon)을 합친 '스노마겟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달 초에도 미국 동부는 '폭탄 사이클론'이라는 눈폭풍으로 한파에 휩싸였다. 뉴햄프셔주의 한 도시는 영하 38도, 체감기온 영하 69.4도를 기록했다. 그래도 대도시들의 기온은 서울보다 높았다. 뉴욕은 영하 13도를 오르내리는 정도였다. 2014년 1~2월 미국 동부 한파 당시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추위가 미국 경제에 충격을 준다"고까지 했다. 그때도 뉴욕·시카고 등 대도시는 영하 15~17도 정도였다.
▶추위가 반갑다는 사람들이 많다. 미세 먼지를 쫓아주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겨울은 '삼한사온(三寒四溫)'이 아니라 '삼한사미(三寒四微)'로 불릴 정도로 미세 먼지가 기승을 부렸다. 춥고 더운 날씨뿐 아니다. 국토의 70%가 산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자연의 가혹한 시련에 응전하는 과정에서 문명이 싹튼다고 했다. 한국인은 불리한 지리 조건과 변화무쌍한 날씨, 주변국의 위협을 물리치고 독자적인 문화와 삶을 지키고 발전시켜왔다. 얼굴이 얼얼한 추위 속에서 한민족의 강인함을 다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