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Why] 7년간의 짧은 노래 인생으로 불멸의 가수가 된 배호

海 松 2017. 12. 30. 20:30


배호의 안개속에 가버린 사랑

https://youtu.be/zMbm6WX7e7M

[Why] 7년간의 짧은 노래 인생으로 불멸의 가수가 된 배호  

[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가수 배호
조선일보DB
"사랑이라면 하지 말 것을/ 처음 그 순간 만나던 날부터/ 괴로운 시련 그칠 줄 몰라"―배호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 중

'사랑'이라는 저 오래된 단어가 배호의 낮고 굵은 바이브레이션을 타고 흘러나올 때, 그 사랑은 이미 슬픔의 그늘 안에 든 것이다. 이어 회한 가득한 연결어미 '라면'을 거느리고 사랑은 깊이 침잠한다. 이윽고 가수는 탄식처럼 토해낸다. "하지 말 것을." 이 돌이킬 수 없는 노래의 첫 문장이 잦아들면, 사랑의 운명은 결국 비극이라는 인류의 오래된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사랑은 언제나 슬픔을 이고 온다.

불세출의 가객 배호의 대표곡 중 하나인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은 그가 남긴 엘레지 중 슬픔의 밀도가 가장 높다. 발표한 지 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첫 줄의 흡입력은 대단하다. 문장은 짧지만 정서적 공간은 세상의 애상을 다 품은 듯 넓다. 하지 말았어야 할 사랑은 대체 어떤 것인가. 운명의 섬광에 눈먼 채, 고통의 구덩이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찬란한 자멸(自滅)의 사연인가. 그래서 "처음 그 순간 만나던 날부터/ 괴로운 시련"이 그치지 않았던가.

배호의 노래는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래서, 처음부터 괴로울 줄 알았다면 사랑을 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럴 수 없으니 사랑이다. 사랑의 사건은 무수하나, 모두 배타적이고 절대적이다. 제각각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고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다만 잊힐 뿐이다. 추억이라 말하는 것들에 물기가 묻어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짧고 허망한 사랑이 끝나고 긴 슬픔의 날이 흐를 때, 마침내 "가슴 깊은 곳에/ 참았던 눈물이/ 야윈 두 뺨에 흘러"내린다. 그리고 사랑은, 사람은 "안개 속으로 가버린"다. 눈물을 쏟고 돌아보니 극진했던 삶의 한때가 종적을 감춰버렸다. 길이 끊기고 열망이 사라진 이 삶의 장막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력함을 보듬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삶은 원래 안개 속이었다. 막막하고 불안한 길을 더듬거리며 겨우 걸어왔다. 안개에 갇힌 쪽은 우리다.

배호는 불과 스물아홉 살에 노래처럼 안개 저편으로 사라졌다. 고작 7년간의 가수 생활이었지만, 그는 한 시대를 충분히 열광시켰다. 오랜 지병이었던 신장염 투병 중에도 히트곡을 쏟아냈다. 죽음을 예언한 듯 유작 앨범 대표곡도 '마지막 잎새'였다. 그의 노래는 삶의 완벽한 배경이 됐다.

배호는 그 자신이 하나의 장르다. 한 시대 가창의 표준을 만들었다. 노래 잘하는 기준은 딱 한 가지였다. 배호처럼 부를 수 있느냐 없느냐. 낮게 떨리는 그의 중후한 목소리는 슬픔을 노래하되 과장하지 않고 절제했다. 고음은 내지르지 않고 목을 잡아 끌었다. 세상의 감정을 일정한 대역에 가뒀다. 그는 시대의 스타일리스트였다. 우아하고 근사한 배호의 포즈를 추종했던 수많은 남자가 아직도 노래방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을 것이다.

재즈 드러머 출신이었던 배호는 애초 프랭크 시나트라 스타일의 스탠더드 팝과 재즈를 노래하며 가수를 시작했다. 그런 그가 트로트를 만나, 한국 대중음악의 불멸이 됐다. 전통적 선율을 스탠더드 팝 가수의 기품으로 노래하게 한 것은, 시대의 한 수였다 . 트로트가 비로소 의젓해졌다. 그가 1971년 짧은 생을 마쳤을 때, 가짜 배호가 쏟아져 나왔다. 저작권 개념이 아예 없던 때라, 모창 가수들이 버젓이 배호 이름을 달고 음반을 냈다. 지금 남아있는 배호 음반의 상당수는 가짜다.

시간이 또다시 저문다. 한 해 끝에서 인생의 먼 끝을 생각한다. 오늘 밤, 배호의 저 낡은 통속(通俗)에 젖어 오래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