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굴동의 봄
용굴동 재를 넘어서니 필용이(남동 형님 친구) 처가 “ 저곳에 미나리가 있다고 한다 ” 차가 멈추기가 무섭게 필용이 처와 마누라가 내리더니, 물을 못 잡은 논인지, 벌 사람이 없어 묵이는 논인지, 얼른 분간이 안가는 논두렁 아래, 퍼렇게 보이는 풀 속에 두 여자가 엎어진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여심이 발동했는지 나올 생각을 않는데다가 지척에 부모님 산소가 있는데도 못 가본 것이 마음에 걸이기도 하고, 신동가는 길옆에 있는 큰집 논위에 있는 작은 방죽 등, 일대의 지형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가 궁금해진다.
용굴 논은 누가 벌기나 할 것인지, 논도 둘러 볼겸 길을 나섰다. 신동으로 가는 길을 접어들어 잔등을 내려서니 추억서린 방죽이 보인다. 저 방죽을 축조하던 총각시절, 어머니 성화에 못 이겨 일하려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리어카를 가지고 가면 한 몫을 더 쳐주었고, 노임의 대가로는 밀가루 전표를 받았다. 가난했던 시절 주민동원 방법이 밀가루였고, 그 밀가루도 현물을 바로 주지도 않고 전표라는 종이 떼기 한 장이 전부였다. 간주는 한 달에 한번이나 해 주었던가? 전표는 보릿고개를 넘어가는 춘궁기 트레이드 마크였던 셈이다.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또 작은 잔등을 지나 신동마을 초입으로 들어서는 길을 비스듬히 돌아서기에 우리 산소를 쳐다보았으나 산소는 보이질 않고 우리 논배미가 시야에 들어온다. 긴 두개의 논배미........ 장식이 형님한테 광진이에게 소작을 주라고 했더니 너무 긴 논두렁 풀 배기가 부담스러워 안하겠다고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내 아버지의 애환과 우리 7형제의 추억이 서린, 우리 가족 모두를 먹고 살게 해 주었던 밥줄이 아니던가 ! 한해도 거르지 않고 겨울 농한기 때만 되면 합배미를 치셨던 아버지 ! 힘이 좋고 부지런했던 우리 아버지는 장구통 모양새를 쏙 닮았다고 하여 일명 장구배미라고 부르기도 했던 천수답 6배미를 2개로 합배미를 치시며 쉴 참으로 가져간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연하다.
산소를 볼 요량으로 조금 더 내려갔으나 산소는 보이지 않고 시간만 지나간 것 같아 되돌아 나오는데, 멀리서 범용이 형님 같은 분이 논일을 하고 있다. 범용이 형님이 맞느냐고 앳소리를 처 보니 맞다 고하여 막걸리를 한잔 하라고 권하자 금세 내려온다.
반가운 마음에 부르기는 했으나 술잔도, 먹을 안주도 없어 망설이자 눈치를 챈 형님 왈, "입이 잔이고 안주는 민들레 꽃 줄기가 제격이라며 " 길바닥에 있는 민들레 꽃 대를 꺾어 먹어 보라고 내민다. 믿기지 않아 망설이다가 먹어보니 쌉씨롱 한 것이 안주로 손상이 없는 것 같다.
우리들이 자라던 어린 시절에는 민들레나 토끼풀, 깻잎 같은 풀들은 먹지도 안았는데, 지금은 별 것들을 다 먹고 살고 있다. 술병을 들고 나팔을 불던 형님이 자네도 한잔 하라고 술병을 내밀기에, 나도 술병 입술을 손으로 쓱 문질러 한 모금하고 내미니 한잔 술이 어디 있느냐며 한 모금 더 하라고 권하며 던지는 말
" 젊던 시절 나는 한자리에 서서 막걸리 3병을 나팔 불었다고 한다. "
지금도 범용이 형님은 한되 짜리 소주 한병을 하루에 바닥을 본다고 들었다. 언젠가 덕식이 한테 그 말을 했더니 큰 걱정이라고 했으나, 범용이 형님은 현대의학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금도 건강하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