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백동
진즉이 써 놓았던 글인데 다시 올려봅니다.
내 고향 백동마을
전남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안태 고향이다.
지금은 70여 호 밖에 안 되는 작고 초라한 시골마을이 되고 말았지만 한 때,
우리가 컸던 시절(1960~80년대)에는 120여 호가 넘게 살았던 마을로 동네
어린이들이 골목길이 꽉 차게 살던 시절도 있었다.
시골마을 치고는 깨나 큰 마을이었던 셈이다.
우리 동네는 진도라는 섬이긴 하지만 바다와는 떨어져
조상 대대로 농사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면서도 자식 교육열 만큼은 대단했었다.
이웃 간에 상부상조하는 미풍양속의 인정 넘치는 협동 정신은
다른 마을 보다 한발 앞서 보자는 일등정신과 한 차원 높은 자정의식으로 승화되어,
진도군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부락이 되었고,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려는듯,
매년 개최되는 면민 체육대회에서는 상위권입상을 도맡아 해 주어 백동에 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깨가 으쓱 해지기도 했으며, 부모님들은 당신들의 못 배우고
가난했던 한을 대물림 시키지 않기 위해 자식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덕택에 우리 면에서는
공무원을(전 현직 포함 75명) 가장 많이 배출하기도 했던,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내 고향 백동 마을이다.
윗마을은 해발 200미터나 되는 희야산이 북쪽에 병풍같이
웃동네를 감싸 앉아 북풍 한 설을 막아주고 동쪽에서 뜬 해가 서쪽으로 지는
정남향에 자리를 잡아,
사람 사는 거택은 정남향이 가장 이상적 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고,
일찍이 간척지를 막아 옥토가 된 벌판은 섬에서는 보기
드물게 넓은 들녘이 남쪽 방향으로 한 눈에 척 들어오고,
오곡백화는 철 따라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 입어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목가적 풍경을 연출해 주고,
아랫마을은 월출산을 배경으로 정 동향으로 자리를 잡아,
새벽녘 동이 트면 진도군에서는 가장 높다는 여기산 자락의 영롱한 햇살이
마을 전체에 서리는가 하면,
마을 앞을 흘르는 실개천 또랑물은, 명당은 바로 이런 곳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졸 졸 잘도 흘러 내리고,
윗마을 동쪽에 정남향으로 자리잡은 용등초등학교는 우리 마을이 타 부락보다
한발 앞서 갈 수 있는 자정의식을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형님먼저 아우먼저의
질긴 인연의 끈을 묶의며 걸고리의 전당으로 자리메김하여 삶의 원천이 되어 주었고,
윗마을 서쪽에 위치한 뒷골은
풍광 좋은 희야산 자락이 펼처진 명당으로,
백동저수지를 축조하기 전까지는 윗마을이 있었던 아담한 계곡이다.
우리는 이 뒷골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텃밭을 갖고있어 무시로 다녔으며,
어린 시절 소 뜯기고 땔감하고,
여름철에는 그곳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기 위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다니던 일터요, 놀이터로 애환이 서린 땅이다.
고향하면, 나고 자란 생가와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기도 하는 숙명의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