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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 모두 “우리가 주인”, 역사 갈등도 뜨겁다

海 松 2022. 2. 25. 08:01

 

 

 

러시아·우크라 모두 “우리가 주인”, 역사 갈등도 뜨겁다

1881년 러시아 화가 바스네초프가 그린 슬라브인과 스키타이인의 전투 장면. 스키타이인은 러시아의 침공작전이 시작된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에서 살던 유목민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 미친 짓을 하는 스키타이 놈들! 자기 집을 불태우다니!”

1812년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침략하면서 뱉은 저주이다. 죽을 힘을 다해서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침략한 무적의 프랑스 군대였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러시아인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피신을 했다. 전쟁이 곧 끝날 줄 알았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자기의 터전을 불태우는 벼랑 끝 전술로 청야(淸野) 작전을 쓴 러시아인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그 해 추운 겨울을 지나면서 프랑스 군대는 꼼짝없이 굶거나 얼어서 죽으면서 패배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인에게 퍼부은 ‘스키타이’라는 저주는 유럽의 오랑캐로 살던 그들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기도 했다.

2700년 전 흑해서 출현한 유목민
서유럽 괴롭히는 슬라브인 상징

화려하고 힘찬 황금문화 선보여
러시아·우크라의 공동조상 해당

러에 크림반도 합병되며 파열음
문화재 소유권 싸고 팽팽한 대립

푸틴 “크림은 고대부터 러시아 것”

나폴레옹이 저주를 퍼부은 지 200여 년이 지난 2021년 3월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 합병 7주년을 맞은 기념식에서 “크림은 고대부터 러시아의 것이며 신성한 역사”라며 대본도 없이 10여 분간 역사 선생님 못지않은 지식을 자랑하며 유창한 연설을 하였다.

러시아인의 대다수를 이루는 슬라브인은 유럽의 동쪽 변방 초원에서 나라도 없이 떠돌던 사람들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려시대가 시작될 즈음에야 비로소 글자를 가지고 ‘슬라브’라는 이름도 알려질 정도로 역사가 짧았다.

스키타이 사람들은 빼어난 황금 문화를 일구었다. 황금 목장식 일부. [사진 위키피디아·강인욱·archaeologia.ru]

그런데 무슨 고대부터 크림반도가 자신들의 역사라고 내세우는 것일까. 그 이면에는 바로 스키타이라는 흑해 연안을 호령했던 유목국가가 있다. 스키타이인은 약 2700년 전에 지금 한참 분쟁이 심한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에서 살던 유목민이었다.

스키타이 사람들은 빼어난 황금 문화를 일구었다. 황금 목장식 전체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강인욱·archaeologia.ru]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의 매력(?)에 빠져서 직접 그들의 지역을 답사하고 아주 자세한 기록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후 스키타이는 유럽을 침략하는 동쪽의 오랑캐를 상징하게 되었고 15세기 이후는 서유럽을 괴롭히는 슬라브 계통의 사람을 상징하게 됐다.

사실 스키타이인의 기원은 동유럽이 아니다. 그들은 약 3000년 전 시베리아의 한가운데인 알타이 산맥 근처에서 처음 발생했다. 이들은 날렵하게 기마를 하고 강력한 활을 쏘면서 빠르게 사방을 정복했다. 거대한 고분, 강력한 무기, 그리고 화려한 황금 장식으로 유명한 이 기마문화는 동쪽은 중국 만리장성 근처까지, 서쪽으로는 우크라이나 초원까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두 차례 한국을 찾은 스키타이 문화

스키타이 사람들은 빼어난 황금 문화를 일구었다. 황금칼집. [사진 위키피디아·강인욱·archaeologia.ru]

우리나라에서도 스키타이의 황금이 두 차례 전시된 적이 있었다. 1991년 11월에 러시아(당시 소련)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트지 박물관의 유물이 들어왔다. 그리고 정확히 20년 뒤인 2011년 12월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거의 똑같은 유물이 전시됐다.

그런데 2011년의 전시회는 우크라이나 정부 차원에서 자신들의 고대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순회 전시의 일환이었다. 소련에서 독립한 직후 스키타이 황금문화, 그리고 나아가서 러시아 역사의 원조가 바로 우크라이나라는 점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스키타이가 실제로 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흑해 연안에 걸친 넓은 지역에 분포했기 때문에 이렇게 두 나라의 같은 전시회가 등장한 것이다.

스키타이 사람들은 빼어난 황금 문화를 일구었다. 전투하는 군인들. [사진 위키피디아·강인욱·archaeologia.ru]

소련 시절 그냥 사이좋게 ‘모든 슬라브인의 조상님’이었던 스키타이였다. 실제로 주변의 유럽에서는 야만인으로 경원시했지만 사실 높은 예술 수준의 황금문화, 그리고 강력한 무기와 불굴의 전투력을 가진 스키타이는 실제 슬라브 계통 나라들의 모습과 많이 유사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었고, 스키타이를 놓고 두 나라는 서로 겨루게 됐다. 단순히 역사 논쟁이 아니라 실제 스키타이의 황금 유물을 두고 싸움을 벌인 것이다. 2014년 크림이 러시아로 합병되면서 그 문제가 터졌다. 당시 한국에도 다녀갔던 스키타이의 황금유물은 네덜란드에서 전시 중이었다.

네덜란드에 남아 있는 황금 유물

스키타이 사람들은 빼어난 황금 문화를 일구었다. 황금 머리장식. [사진 위키피디아·강인욱·archaeologia.ru]

그런데 졸지에 그 유물이 발굴된 곳의 나라가 바뀌면서 돌려줄 나라가 우크라이나인지 아니면 러시아인지로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얼핏 보면 우크라이나가 당연할 것 같다. 하지만 2014년 크림반도의 합병은 전쟁이 아니라 주민 96%가 압도적으로 찬성한 자발적 합병이다.

이런 경우 크림반도에서 출토된 스키타이 유물은 크림반도의 주민(즉 러시아 측)에게 돌려주는 게 맞는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1심에서 우크라이나가 이겼지만 2심에선 러시아에 유리한 판결이 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도 크림의 스키타이의 황금유물은 네덜란드에 계속 남아 있고, 두 나라의 갈등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깝다. 언어도 큰 불편 없이 알아들을 정도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져서 우크라이나 서쪽은 폴란드, 나아가서 서유럽에 가깝고 동쪽은 러시아의 문화와 유사해지는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가지는 양면성은 그들이 위치한 경계라는 특성에서 기인한다. 우크라이나라는 나라 자체의 이름이 ‘변방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유라시아 초원의 끝인 동시에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시작이다. 이런 지리적 특성은 2600년 전 스키타이 때에도 똑같았다.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

스키타이 사람들은 빼어난 황금 문화를 일구었다. 금잔. [사진 위키피디아·강인욱·archaeologia.ru]

유라시아 유목문화에 기반을 둔 스키타이는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해당하는 흑해 일대에서 자리를 잡았다. 흑토지대라는 곡창지대의 근처에 있으면서 스키타이는 농경 스키타이, 그리고 유목을 하는 유목 스키타이로 나뉘어서 자리를 잡았다.

농경과 유목이라는 서로 다른 경제의 이점을 취하면서 스키타이는 빠르게 국가로 성장하고 그리스와 주변 지역을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 양면성 때문에 나라가 위태해지면 두 집단은 서로 대립하고 갈라지기 마련이었다.

사실 비슷한 상황은 중국 북방의 흉노에게서도 있었다. 흉노는 중국에 귀의한 남흉노와 유목생활을 하던 북흉노의 내분이 격화되며 한순간에 멸망했다. 서방으로 향하려는 우크라이나와 그를 통제하려는 러시아의 숙명적 대립은 초원과 농경민이라는 지리와 역사적 상황 속에 내재하는 영원한 난제이다.

최근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특별 군사작전을 선포한 데 이어 우크라이나를 향한 전면 침공을 시작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경제 제재에 속도를 내며 단호한 대응을 천명했다. 지금껏 러시아 전문가들은 전면전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서로 싸우며 갈라서기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너무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양국은 언어와 문화가 비슷한 것은 물론 역사 또한 서로 분리해 생각하기 어렵다. 앞으로 전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우려가 크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둘 다 스키타이에서 기원했으며 최초의 국가도 서기 9세기 말에 현재의 우크라이나에 자리 잡은 키예프 공국이다. 그 이후 우크라이나만의 나라가 세워진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 대표되는 슬라브 계통에서 분리돼서 서유럽의 일원이 되기도 쉽지 않다.

유럽에 만연한 러시아 공포증

지난 수백 년간 서방에서는 러시아 공포증(루소 포비아)이 뿌리 깊게 내려왔다. 그러니 갑자기 그 공포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를 유럽으로 편입하는 것은 단기간에 되기 어렵다. 아마 중국이 주변 민족을 통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처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다투면서 그 힘이 약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클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과정은 결코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전통적인 공동의 조상인 스키타이와 최초의 국가인 ‘키예프 공국’의 문제부터 정리해야 한다. 그러니 두 나라의 무력 충돌과는 별개로 스키타이로 시작되는 문화재와 역사 분쟁으로 다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는 결코 정치적이지 않다. 하지만 유물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은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스키타이를 둘러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립이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