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해을 보내며
지는 해를 보내며 (환갑 때 써 보았던 글)
기축년 한해도 여늬 해와 별반 다르지 않게 서산에 한 장만 달랑 거린다.
개인적으로는 환갑이라는 의미가 곱게 포장되어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보게도 해주었던
나름대로는 귀하기만한, 한 해가 또 지려는가 싶은 게 여간 아쉽기만 하다.
깊어가는 겨울 밤,
내일도 매우 춥다며 동파에 대비하라는 아파트 안내 방송을 듣고 있자니
아버지 생각이 새삼 절로 나는 시간이다.
어느 해 였던가 !
아주 춥던 겨울 어느 날,
뜨끈한 아랫목에서 온 가족이 감자로 점심을 먹을 때 였던 것으로 기억 되는데 아버지께서
“ 여름은 여름답게 덥고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풍년이 든다.” 고 하시던 말씀이 오늘따라 새롭게 떠오른다.
금년 겨울이 예년 보다 추운 것으로 보아 옛날 같으면 아버님 말씀처럼 내년에 풍년이 들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예감인데,
지금은 지구온난화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는 현실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수백 억 년 전이라는 지구생성연대로 볼 때, 우리 세대가 철들고 살아온 세월은
불과하면 40~50년 못 미치는 시간인데,
우리아버지 말씀을 곧이 곧대로 믿지 못하게 되어버린 오늘날의 현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객지 생활을 하면서 진도 사람이면 한번쯤 같은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진도는 과거 유배지였기 때문인지 시.서.화.창의 뿌리가 깊고 또한 즐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으며,
진도 아가씨들은 무척 억세고 활발하다는 말을 말이다.
여러 일화 중 가장 대표적인 얘기가
“ 아지랑이 아롱거리는 봄 날, 나물을 캐고 있던 크내기들이 낯선 총각이 지나가면
나물캐던 매꼬리로 길을 막아 놓고 노래를 불러야 길을 터 주었다” 는 일화가 아닌가 한다.
이렇게 진도 크내기들이 남성들 못지않게 드세게 된 배경에는 거칠고 힘든 바닷가 생활에 적응하다보니
강해 질 수밖에 없었던 자연적 현상에다 돈도 생기면서 형성 된 기질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보고자란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을 낳고 키우며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남편 따라 들일까지 하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군소리 한마디 없이 사시던 모습만 보고 살다가,
군대생활을 한답시고 강원도 양구엘 가니,
여자들은 집안일과 애들만 키우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한데.....................
요 며칠 전, 처가 쪽 형제들과 망년회를 하던 자리에서 진도에 살고 있는 처형으로 부터 들은 말은
진도 어머니들의 뼈골 빠지는 희생이 지금도 끝나지 않는 진행형이라는 사실 앞에 어머니 생각이 나서 글을 써 보게 되었다. 우리들이 자라던 시절에는 겨울철 농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겨울철이 더 바쁘다는 것이다.
겨울철에는 남성들의 일거리가 없는 반면, 여자들은 대파나 배추작업으로 일할 곳이 지천에 널려 있고,
배추작업으로 여자들이 하루 20만원을 벌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의 하루 노임이 통상 4만원 내외인 반면에 웃게 도리로 배추작업을 하게 되면 20만원을 벌수 있는데,
그 돈을 벌기 위한 고생이 장난이 아니 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배추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밥 한술 뜨고
도시락을 가지고 5시에 집을 나와 전남북 일대 배추 밭 작업현장까지 7시까지 도착하여,
같이 간 일행들 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위한
선의의 경쟁에 내몰려 차주가 제공하는 간식도 먹지 못하고 밤 8시까지 일을 하고,
어떤 때는 상차까지(차에 배추를 실어주는 일) 해 주고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를 넘기가 십상이고,
한 4시간 자고 다시 또 일어나 그 뒷날 같은 일을 하려 간다는 초인적인 얘기와,
일을 하면서 오는 전신의 통증을 이기기 위해 뇌선을 하루 10포 이상 씩 먹는다는 사실과 함께,
다음의 일화는 고통과 설움을 해악으로 이기며 달래고 살아온 지혜가 번뜩이는 것 같아 처음에는 웃다가도,
종래는 안타까운 마음을 지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전북 고창까지 멀리 가서 웃게 도리로 배추작업을 하고 있는데,
평소 일손이 더딘 아주머니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여 돌아보니
“ 어 야 세등엄매 어지러워 꼭, 죽을 것 같네, 나 죽거든 배추작업으로 그동안 돈 많이 벌어 놓았으니
그 돈으로 돼지 잡아먹고 하루 푹 쉬었다 일들 하게 ”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같이 돈벌려고 멀리 타관까지 온 동병상린의 처지였지만
너무도 짠한 생각에 일손을 놓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라던 농자천하지대본 시대의 겨울은
말 그대로 목가적 풍경이었다.
소죽 끓이는 작은방 감자 두데통에는 인심 좋은 감자가 한방 가득이요.
마을 백운내 가게와 희종이 삼촌네 점방에는 막걸리 잔으로
마누라 잔소리를 묻어버린 넉넉한 인심과 허세가 소복이 쌓이고
저녁 무렵이면 대부동에 나무동을 내려놓고
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엄매 나무꾼들의 웃음소리가
서풍을 타고 시름을 떨구면,
집체만한 나무배눌을 믿고 때어 되는 뜨끈한 아랫목 온기에
비록, 가난은 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한 하루해가 덩달아 지고,
닭 우는 소리에 눈 떠 이웃집에 총총 걸음으로
모실 가는 여유를 담은
붉은 태양은
어김없이
여귀산에 뜨기만 잘도 해 주었는데...................